[영화]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 (2011)
Dancing Dreams
7.4
글쓴이 평점
작년 피나 바우쉬 무용단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 공연을 통해 다양한 생김새의 인간 몸의 본연의 아름다움과 원초적인 육감성(이는 정확히 관자의 시선을 염두에 둔 몸짓에서 느낄 수 있는 시선의 말초적인 쾌감을 위해 계산된 육감이 아니라 몸에서 우러나오는 감각이라는 의미의,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인 단어로 포착하기 어려운 그래서 더더욱 육감적인 그 무엇이다. 아! 나의 부족함이여.) 그리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건강한 요염함에 매혹당했더랬다. 힘있으면서도 극도로 섬세하기도 한 인간의 몸과 몸짓의 표현에 대해 '주봉사'가 눈을 뜬 '공양미 삼백석'같은 공연이었다.
피나 바우쉬가 무용을 배워본 적 없는 10대들을 데리고 자신의 작품 '콘탁트호프(Kontakthof)'를 공연하기까지의 과정을 닮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개봉 소식을 접하고서는 꼭 봐야겠다며 벼르고 별러왔다. 영화의 홍보효과를 고려해 제목에 피나 바우쉬를 전면에 내세운 듯 하나 사실 영화 자체의 분량으로 보자면 피나 바우쉬는 그저 십수분 정도만 출연했을 뿐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들은 무용에 대한 사전 지식없이 공연 준비에 참여한 10대 청소년들이다. 처음에는 수줍고 어색하고 서툴렀던 그들이 무용에 몰입해가면서 점차 자신의 몸과 감정을 자연스레 호흡해가는 과정을 보며 예술이라는 것에 가치와 효용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된다는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속에서 자신이 아닌 것들- 역사, 사회, 문화적으로 주입된 그 무엇들, 자신의 것이 아니면서 당연한 것인냥 그러나 결국에는 부자연스러울 수 박에 없는 흡착물들-을 탈각하여 온전하게 순수한 나, 그 어떤 편견이나 판단의 시선을 거부하는 나를 오롯이 발견하고, 건져내고, 살려내는 일.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예술이고 예술의 힘인 듯 싶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첫 공연을 훌륭하게 마친 아이들 모두에게 피나 바우쉬가 무대에 올라 장미꽃을 한 송이씩 주며 축하하는 장면이 나온다. 피나 바우쉬가 일일이 포옹하며 나눠준 꽃은 그간의 힘든 노력과 성공적인 작품 공연에 대한 축하의 전달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이 자신 속에서 발견한 한 송이의 꽃, 곧 그 아이들 자신이 꽃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고백컨데, 예술이라는 단어에 대해 설레임보다는 고갈되어버린 자신의 힘을 감추기 위해 가까스로 사기나 말장난으로 버텨보려 안간힘쓰는, 눈뜨고 보기에도 민망한 거덜남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이제 예술은 정녕 '기생의 손모가지'같이 그저 돈 있는 사람들의 심심풀이 땅콩 보다는 좀더 그럴 듯한 (그래봤자 심심풀이 땅콩일 수 밖에 없는) 여흥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회의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보았던 <엘 시스테마>와 오늘 본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는 예술의 힘을 내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는 미술에서는 이러한 힘을 여전히 느낄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