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side

[책] 울분_필립 로스

까만머리 앤 2011. 2. 20. 23:54

 

 

한 세계와 한 시대를,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인생을 살아낸다는 것은 길고 짧음을 떠나 누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삶이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온전히 주권을 내주고 주인인 그의 처분만을 기다린다면야 무엇이 문제일까마는 문제는 삶이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 마음대로 조종당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있고 그리고 그가 살아감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삶이라는 점은 분명하건만 삶은 사람의 통제를 거부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닿지 않고 건드릴 수 없는 단단한 철옹성의 영역에 부딪히게 되는데, 소설 『울분』의 주인공인 마커스 메스너의 삶 역시 그러하다. 20년을 채우지 못한 짧디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는 주인공의 회상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소설에서 나는 작가 필립 로스의 삶에 대한 분개를 읽을 수 있었다.

 

마커스는 갓 대학생이 되었고, 스스로를 책임지는 성인이 되려 한다. 보수적이고 위압적인 가정과 학교, 그리고 1950년대 초의 역사 속에서 그에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권위와 관습의 세계이고 독선과 아집, 비합리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려는 자에게는 무거운 징벌이 내려지는 세계였다. 마커스는 한편으로는 이 세계의 질서에 안정적으로 편입하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이와 대면하고 도전하지도 못하는 괴리상태에 놓인다. 그러던 어느 날 올리비아 허턴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억눌렸던 불안과 혼란은 극대화되고 자신을 무섭게 몰아세우는 세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다. “나는 엘윈을 이해하지 못했다. 플러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올리비아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p.85) 그는 이 이해되지 않는 세계의 경계선 위에서 아슬하게 홀로 서보고자 한다.

 

일어나라, 너희,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여! 우리의 살과 피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건설하리라!”(p.92)고 외치는 중국의 국가, “세상을 사는 데서 오는 공포에 노예처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라”(P. 113)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처럼 그는 비합리와 부당함의 세계와 삶에 대한 복종을 거부한다. 그러나 세계는 자신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마커스가 자신도 징집되어 한반도에 가서 전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강박적인 두려움과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의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해 드러나듯 세계는 위협을 가한다. 이 무섭고도 거대한 세계와 홀로 대적하기에 마커스는 너무도 여리고 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서 점점 설 곳이 없어진다. 세계는 미끄러져나가려는 그를 자꾸 궁지로 몰아간다. 부모님의 집으로부터, 플러서의 방과 엘윈의 방으로부터 닐 홀의 꼭대기 층 방으로 점점 그를 몰아가더니 전장인 한반도로 내쳐 끝내 이 세상에서 그를 영원히 추방하기에 이른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예측을 벗어난 지점이 있는 곳 그래서 우리의 존재를 뒤흔들고 혼란에 휘말리게 하는 것. 그렇기에 삶은 늘 위태롭고 세상과의 만남은 엇나가고 삐걱댄다. 그 앞에 홀로 선 인간은 힘없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이다. 삶과 세계의 독선과 횡포로 부당한 시련을 겪지만 이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며 등지고 돌아설 수도 없는 인간 존재의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비극성. 마커스는 그러한 삶과 세상에 제물로 바쳐진 노예가 되기를 거부정결한 고기였다.

 

작가는 마커스가 죽은 뒤 약 20년 후 와인스버그 대학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권리 운동 및 그 결과를 덧붙임으로써 삶의 비극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20년 전 같은 나이의 청년이었던 마커스에게는 절대 금기여서 죽음으로 몰고 갔던 채플 거부가 20년 후에는 하룻밤 만에 너무도 쉽게 용인되는 상황을 두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희비극의 교차를 본다. 삶과 세계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굴레는 영원불변의 것이 아닌 우연적인 것이다. 문제는 그 우연이 비극의 숙명을 인간에게 짐 지운다는 사실이다. 우연을 필연으로 살아내야 하는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과 그 비극성 그리고 이에 대한 울분을 마커스의 짧은 인생을 통해 작가는 강렬하게 토해내고 있는 듯 하다.

 

냉정한 문장과 휘몰아치는 내용이 빚어내는 불길한 불협화음과 그 속에서 차갑게 번뜩이는 삶에 대한 강렬한 의식은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이다. 작가가 서슬 퍼렇게 말하는 삶과 세계의 무자비함에 가슴을 베여 푸른 피가 뚝뚝 떨어진다. 노장의 소설가이건만 무뎌지지 않고 이렇듯 두 눈 부릅뜨고 삶에 대해 끈질지게 파고 드는 것, 우연이 필연이 되는 부조리한 지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그 모든 순간을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세계의 희비극의 비극적인 교차와 삶에 대한 성찰을 주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지닌 힘이고 작가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