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의 아틀리에>와 <작업실의 자코메티>
블로그를 만들고 몇개월이 흘렀을 무렵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전시를 볼 때 그 이전에 읽거나 보거나 들었던 다른 어떤 것이 함께 연상되는 때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 그 순간에만 번뜩할 뿐 인상조차 남기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이 많았다. 아까웠다. 그래서 블로그에 이를 기록해야겠다 했다. 그리고 이들을 묶어서 데자뷰라고 칭하면 좋겠다 싶었다. 데자뷰라는 항목을 재빨리 만들어두었다. 그러나 첫 운을 못 떼어, 좀처럼 채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몇달 전의 일이었다. 이제서야 첫 글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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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로드가 쓴 <작업실의 자코메티>를 읽고 난 뒤 예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났다. 장 주네의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였다. 이 두 책 모두 미술가인 자코메티에 대해 쓴 글이다. 두 저자는 모두 작업실에서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코메티를 만나고 작가로서의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관찰을 기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권의 책에서 자코메티와 그의 작품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작업실의 자코메티>는 제임스 로드가 자코메티를 위한 초상화 모델을 서주었던 18일간의 기록이다. 18일간 자코메티는 제임스 로드의 초상화를 그렸고 제임스 로드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코메티를 글로 그렸다. 기록에 따르면 자코메티의 작업과정은 매일 그렸다 지우고 다음날 다시 시작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그는 작품을 그려나가는 매 순간 "안되겠다"를 연발하며 그렸던 그림을 지우고 그 위에 또 다시 그린다. 그렇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과연 그는 무엇을 그리고자 아니 어디에 이르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절망하고, 지워내고,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절망하는, 자코메티를 제임스 로드는 다음과 같이 그린다.
카페 뒤쪽에 홀로 앉아 세상의 칭찬이나 인정은 뒤로 한 채 아무런 위안도 될 수 없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는 꿈과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 사이에서 평생 고통받는 모습이 진정한 자코메티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다. (138쪽)
그 순간 거기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가끔씩밖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리얼리티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지치지도 않고 벌이는 끝없는 분투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그려낸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을 그려내자면 본질을 왜곡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시시포스의 일을 선택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시포스의 일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이고, (149쪽)
그가 그림을 끝내자 나는 “사물이 당신에게 어떻게 보여질지 상상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예요. 사물이 내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시각을, 그러니까 당신이 본 대로 다른 사람들도 보게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십니까?”
“그게 내가 하는 일이긴 한데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159쪽)
그러면서 우리는 자코메티가 하고자 하는 일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벽에 한 번 더 부딪히게 되었다. 비슷한 것, 결국은 환영인 것, 그것이 해낼 수 있는 일의 전부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환영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채워질 수 없는 어떤 부족감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것이 되었으며 그가 심해질수록 나도 더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185쪽)
그에게 그림이란 존재하는 어떤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그려내기 위해 끝없이 분투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이를테면 일종의 부산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197-8쪽)
이처럼 모델이 되어 그리고 또 그리는 지난한 과정을 마음 졸이며 함께 한 모델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제임스 로드와는 달리 장 주네는 작품 자체, 특히 그의 조각에 집중한다. 작업 과정을 동행한 것이 아닌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만을 관조한 까닭이다. 장 주네는 자코메티의 대상의 비워내기, 곧 대상으로부터 불필요한 껍질 벗겨내기에 주목한다. 그는 존재를 세상과 단절시켜 그 존재와 독대하고 그 본래의 모습-장 주네를 이를 "고독"이라 칭한다-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자코메티의 작품이라고 본다.
몇 구절을 옮겨본다.
그의 조각상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이 혈통적 유사성은, 개개의 인간 존재가 마지막으로 모여들게 되는 지점, 더는 다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소중한 귀착점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다른 모든 존재와 정확하게 똑같아지는 우리들 각각의 고독의 지점.(23쪽)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이 바로 그 비밀스런 장소-물가를 저버리고 찾아드는 곳-, 달리 어떻게 묘사할 수도 더 자세히 그릴 수도 없는, 그러나 누구든 거기에 몸을 감추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존재가 되는, 그러한 곳으로 숨어들어 가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52쪽)
자코메티가 그려낸 대상들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안심시키는 것은 그 대상이 '좀더 인간적으로'-인간이 쓸 수 있고 끊임없이 써 왔던 것이라는 의미로-표현되어서가 아니며, 가장 좋고 부드러우면서 감각적인 인간의 실재가 대상을 감싸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가장 순수하게 신선한 상태의 바로 '그 대상'을 자코메티가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것도 함께하지 않는 상태의 대상 그 자체. 그 완전한 고독 속의 대상.(59쪽)
대상들에 대한 놀랄 만한 존경심. 각개의 대상은 '홀로'있을 수 있기에 아름답다. 그 안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므로 자코메티의 예술은 대상들 사이의 사회적인 관계-인간과 그의 분비물이라는 관계-를 맺어 놓은 사회적인 예술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가진 것 없어도 당당한 룸펜의 예술이며, 대상들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의 고독에 대한 인식이라는 순수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60-61쪽)
장 주네가 자코메티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읽어내고 있는 "고독"이란 대상 그 자체가 응축되고 압축된 지점, 생의 압축된 지점을 일컫는 듯 하다. 이는 장 주네가 자코메티의 작품 중에서 형태의 감축이 확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조각을 집중해서 바라 보았다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길게 늘여진, 뼈대만으로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그의 인물상은 자신의 부산물인 살과 피는 미련없이 흘려보내버린 듯 하다.
단독자로서 오로지 자신만을 독대하고 있는 듯한 그의 인물상에서도 제임스 로드의 초상화 위에서 망설이며 그리고 지웠던 그의 손길을 읽을 수 있다. 덩어리를 붙였다, 도로 떼어내고, 다시 붙이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했을 작가의 손길은 그의 고민과 절망, 체념 그러나 다시 견디어냄을 반영한다.
결국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계속 닿고자, 닿아내고자 하는 사람의 심정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자코메티를 생각할 때마다 <좀머씨 이야기> 속의 좀머씨가 생각났다. 그저 걷고 또 걸었던 좀머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