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 여름에 쓰지 않았던 휴가를 받아 집에서 일주일간 편히 쉬며, 아픈 허리도 치료 받으며 그렇게 보냈더랬다. 그 때 여러차례 마음은 먹었으나 시작할 엄두를 못 내었던 책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감했었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했거나 읽었거나 보았던 책들을 대학생이 되면서 거의 대부분 과감하게 버리는 정리를 한 이후 책은 나가는 일 없이 계속 쌓이기만 하면서 나의 방은 점점 좁아갔다. 좁아가는 것은 나의 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몸이 아닌 가슴이 무척이나 갑갑해하며 못 견뎌했다. 그렇지만 당장 귀찮고 일단 시작하고 나면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일이 될 것임을 예감한 나의 몸의 약삭빠름에 답답한 내 가슴은 번번이 뒤로 밀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픈 허리에도 불구하고 더는 미룰 수 없겠어서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썼다. 먼저 미련없이 버릴 수 있는 것들부터 솎아냈는데, 대학교 때의 전공서적 몇몇과 수업노트, 대학원 때 발표수업 준비를 위하여 복사했던 자료들 및 슬라이드 필름들이었다.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현대미술과 관련한 책 몇권을 제외하고는 다시 읽거나 참고한 전공 서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학교에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왔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길게는 16년이 지난 오늘까지 보지 않았던 책이나 자료들을(지금은 사용하지도 않는 슬라이드 필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다시 보게될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설사 학교로 돌아간다해도 지금은 거의 보지 않는 자료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더군다나 내가 정치학이나 미술사학을 다시 공부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이즈음에 이르자 골라 내는 손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수업을 듣긴 했지만 그 수업 자체가 왜 존재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수업과 관련된 책과 노트, 자료들을 고민 없이 버리자 숨통이 트이면서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책과 자료들을 버리면서 나의 미련한 미련도 함께 실려나갔나보다.
그 다음으로 버린 책들은 여성의 성공에 관한 각종 책들이었다. 사실 이 책들은 내 취향과는 전혀 무관한데다, 스스로 사본 적이 없는 부류의 책들이다. 그럼에도 내 수중에 적잖은 책들이 놓여 있는 것은 모두 나의 '성공적인 삶'을 바라는 사람들의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반 이상은 아빠가 사주신 듯 한데, 아빠는 서점에 가실 때면 당신이 보실 책과 함께 꼭 한 두권씩 이런 책들을 사서 주시곤 했다. (올해들어 아직 이런 책을 받지는 않았지만 아빠는 최근까지 내가 '성공적인 여성'이 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선물로 받은 책들은 가급적 남겨두려했으나 이 책들은 받아서 제대로 읽어 본 일이 없거니와 나는 그들의 성공을 원치 않을 뿐더러 내가 가고 싶은 길도 아니기에 애초부터 나와 함께 할 이유가 없는 책들이었다. (부모라고 해도 자식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이렇게 두 부류의 책들을 정리하고 나자 책장의 상당 부분에 빈 공간이 생기면서 내가 간직하고픈 책들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학교재, 각종 사전 같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남겨둔 소수의 책들을 제외하면 내가 자라오면서 각 시기에 필요로했던 감동과 재미, 깨달음을 주었던 문학책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지금은 갖기 힘들어진 열의를 갖고 들으며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수업의 교재들(고대/현대/동양정치철학, 유럽정치사, 한국현대정치, 현대조각사, 전후현대미술 등)과 이제와 뒤늦게 따로 공부하며 매료되고 있는 분야(벤야민, 프로이트, 라캉, 들뢰즈, 바르트 등)의 책들이 채우고 있다. 남은 책들을 보니 내가 대충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작년 연말 이처럼 책장을 가벼이 하고 나자 남은 책들을 내 기준에 따라 분류를 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큰 책장을 하나 주문해놓았는데 그 책장이 도착하여 설 연휴가 시작된 첫 날인 오늘 책 분류, 정리 작업에 몰두하였다.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을 나름의 규칙에 따라 분류하고 그에 맞는 책장의 자리를 정한 다음 꽂아나가기 시작했다. 많이 솎아내긴 했지만 적지 않은 분량의 책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모든 책들을 다 꺼내 다시 자리를 배치하여 정리하느라 하루 해가 짧았다. 큰 책장을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장이 모자란다. 제 자리가 없어 박스에 임시 보관해 둔 책들을 정리하자면 아무래도 책장을 하나 더 구입해야할텐데, 그 책장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겠다. 그래서 작년 연말에 시작된 나의 책 정리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렇지만 어떤 책들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그리고 당분간은(^^) 훤히 알 수 있어서 예전처럼 같은 책을 또 구입하는 일은 이제는 그리고 당분간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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