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off the record

2011.7.12

까만머리 앤 2011. 7. 12. 16:5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63017033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94979&CMPT_CD=P0000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의 김진숙씨의 1인 농성이 오늘로 188일째로 접어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고 뭐 또 그저그런 농성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간단히 넘겼었다.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김진숙씨의 농성을 지지하고 이와 연대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진행했다는 뉴스를 보았어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얼마전 프레시안의 김곰치씨의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아팠다. 함께 살아가는 것의 책임감을 저버린 내 삶이 수치스러웠다. 나 밖에 모르고 나만의 안위만 붙잡고자 했던 내가 참으로 죄스러웠다. 

 

여태껏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강자의 시각을 내면화시켜 노동자들의 쟁의 모두를 나라나 회사 전체가 어떻게 되든지간에 자신들만의 이익을 내세우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아주 단순하게 치부해버렸다. 나는 강자도 주류도 아니면서 그 시선을  내 것인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허위의식에 독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대학교 때의 일이다.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모임이라는 이름 하에 교수님 두 분과 학생 몇 명이 모여 이러저런 글을 읽고 토론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 모임에서 가장 연세가 높으신  교수님께서 어느 날 모임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와 돌아보니 양 세력이 서로 투쟁하고 부딪힐 때 약자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것 같다고. 그러자 젊은 다른 선생님께서 뾰루통해져서는 무슨 일이든지요?, 약자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잖아요, 옳지 않아도 약자 편을 들어줘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라고 반문하셨다. 그러자 노교수님은 그렇다 해도 약자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하셨다. 그 때 나 역시 젊은 교수님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약자라고 해서 편을 들어주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동정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김진숙씨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일을 떠올렸다.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그 때 노교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것 같다. 약자와 강자가 부딪힐 때, 약자가 강자에게 저항할 때, 약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이다. 본래 자기 것이라고 할 것이 얼마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마저도 모두 포기할 각오로 내놓고서 약자는 강자에게 나선다. 강자는 자신의 전부를 내놓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것 중에서 일부만을 놓고 약자와 대면할 뿐이다. 강자는 그것 없이도 충분히 게다가 잘 살아갈 수 있다. 약자는 강자에 대한 저항에서 패할 경우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지탱해 줄 것이 남아있지 않다. 이럴 경우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약자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자의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실쳔해야하는 것인지는 잘은 모르겠다. 비겁한 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희망버스를 타고 가서 함께 있어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지만, 두렵기도 하다. 시몬느 베이유와 같은 용기가 절실해지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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