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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성당_레이먼드 카버

까만머리 앤 2011. 1. 18. 23:51

 

처음 접한 레이먼드 카버의 책이다. 사실 구입한지는 좀 오래 되었다. 구입하자마자 앞의 한 두편을 읽었는데, 너무 건조하기도 하고 스산하기도 하고 소소하기도 해 더이상 매력을 못 느끼고 그늘진 구석에서 꽤나 오래 묵혀 놓았던 책이었다. 얼마전 책 정리를 하다가 미처 다 읽지 못한 점이 못내 걸려 다시 손에 잡았다.

 

너무 단조롭고 아무 일도 없는(아무 일이 없지는 않다. 다만 서술되는 내용에 있어서 모든 등장인물들을 뒤흔드며 독자까지도 정신없이 휘몰아넣는 구심점 역할의 사건, 사고가 드물 뿐, 아니 거의 부재할 뿐이다) 단편들을 내용만큼이나 건조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어, 다시 읽을 때에도 역시나 첫 두 편 정도를 읽었을 때 시험이 찾아왔다. 계속 읽어야 하는 것인지. 계속 읽으려면 꽤나 힘이 들 것 같았다. 그 때까지 느낀 점이라고는 이렇게 너무나 아무런 일 없는 삭막한 글로 소설을 만들어내다니, 이것도 참 놀라운 재능이긴 하다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편을 넘어서기 시작하니 글의 묘한 매력이 느껴지면서 그 단조로움 가운데 자리잡은 무언가 깊은 힘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 작가가 삶을 그냥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작가는 매우 단조로운 일상(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런 순간들로 채워져있다)을 매우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접근하는데, 대단한 날카로운 집중력을 갖고서 삶의 순간과 순간 사이에 위치한 여백, 진공을 포착해 낸다. 그 여백, 그 진공의 찰나에 무언가가 일어나 삶의 뉘앙스는 변하고 달라진다. 객관적인 상황 그 자체는 변한 것이 없지만 존재의 차원은 달라지는 이러한 마법이 작동하는 간기(間期)를 글로 단단하게 붙드는 데에서 작가의 끈기가 배어난다.

 

+책갈피 1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하게 보았던 단편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었다.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가 말했다. (p.141)

 

"이 냄새를 좀 맡아보시오." 검은 빵 덩어리를 잘라내면서 빵집 주인이 말했다. "뜯어먹기 힘든 빵이지만, 맛은 풍부하다오." 빵 냄새를 맡은 그들에게 그가 맛을 보게 했다. 당밀과 거칠게 빻은 곡식 맛이 났다.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더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그건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 같았다. 그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p.142-3)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싶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 김이 뜨거운 밥과 국은 그의 언 속을 쓸어내려 줄 것이다.

 

+책갈피 2

"기차"

여인은 미스 덴트를 힐끔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가씨, 모르긴 해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었겠지. 틀림없이 그럴거야. 얼굴에 다 쓰여 있는걸. 그렇지만 말하고 싶진 않은 거지. 그럼 그렇게 해. 말하지 마. 말하는 건 우리가 할 테니까. 하지만 아가씨도 나이가 들겠지. 그때가 되면 아가씨도 뭔가 할 말이 생길 거야. 내 나이가 되면 그렇게 될 거야. 저 사람 나이가 되든지." 여인은 이렇게 말한 뒤, 노인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럴 리가 없다구? 하지만 그렇게 되고 말지. 달콤한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되는 거야. 지금이야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괜찮아. 싫어도 결국 그런 때가 올 테니까." (p.238-9)

 

승객들은 당연히 이 세 사람이 동행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이 밤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이 행복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승객들은 살아오는 동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들도 봐왔다. 잘 알다시피 세상은 별의별 종류의 일들로 가득하다. 그런 까닭으로 이 세 사람이 통로를 걸어 자기 자리를 잡는 동안-여인과 백발노인은 서로 나란히 앉았고, 핸드백을 든 아가씨는 몇 자리 뒤쪽에 앉았다-, 그들은 더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승객들은 역을 바라보며 그 역에 기차가 서기 전에 저마다 빠져들었던 생각, 그러니깐 저마다의 문제들로 돌아갔다. (p.241)

 

+책갈피 3

"열"

바로 그 때, 그가 창가에 서 있을 때, 그는 뭔가가 완전히 떠나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일린과 관계된, 이전의 삶과 관계된 그 뭔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적이 있었던가?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는 것을 안다. 비록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비록 그게 불가능하게 보였고 그가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p.287)

한때 뜨거웠던 그 무엇은 그렇게 뜨겁게 달구어진 적이 있었다는 기억과 함께 언제나 열처럼 언젠가는 과거가 되어 버린다.

 

+책갈피 4

"대성당"

"어때?" 그가 말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p.352-3)

 

 

+덧붙임

이 책을 읽다보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났다. 별일 아닌 일을 밀도있게 쫓아가서 연상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